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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의사회학>22. 졸혼 할 바 엔 차라리 이혼을 한다고?

졸혼/졸혼의사회학

by 죽비 2018. 2. 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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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혼의사회학>22. 졸혼 할 바 엔 차라리 이혼을 한다고?






종이책출간정보

http://www.bookk.co.kr/book/view/35854



간간히 방송 소재로 나오는 졸혼 이야기. 대부분 가벼운 정도의 얘기이고 웃음을 유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출연자가 얘기하는 내용에 그 뜻을 그리 무겁게 두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소재 자체에 대해 그리 크게 비중을 두어서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각자 ‘졸혼’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를 통해 행복한 부부 또는 결혼은 공통점이 있지만 불행한 부부 이혼한 부부들은 그 이유가 각각 다르더라는 얘기는 일견 진리이고 정답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졸혼을 대하는 자세 또한 그리고 졸혼에 대해 느끼는 감정 또한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 어느 출연자의 졸혼에 대한 생각 “졸혼 할 바 엔 차라리 이혼 하겠다”는 생각도 일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부부관계에 대해 자신의 솔직한 가치관일수도 있다.

여기에서 2017년 네이버국어사전기준 최다 검색기준1위인 ‘졸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정리 해보자.


첫째, 졸혼의 개념이 등장한 배경 중 핵심내용중 하나는 ‘100세 수명시대’의 도래이다. 정년퇴직 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 얘기 해보자는 동기를 제공한다는데 ‘졸혼’은 그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어느 사회나 정년퇴직의 시기가 되면 아이들은 성장 출가 하고 퇴직한 부부들은 얼마 남지 않은 생애에 대해 휴식을 취하면서 삶을 마무리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생애주기 싸이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년퇴직 후 최소 20~30년, 아니면 어떤 사람들은 살아온 시간만큼 또 살아가야 하는 세월이 보증되어있거나 담보 되어 있다는 것이다.


1848년 2월의 어느 일요일, 교회에 다녀온 화가 토마스 콜은 피로감과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3일 후 죽음을 맞았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2017년 4월30일 올해 146세 생일을 지낸 인도네시아인 음바 고토(Mbah Gotho)씨가 사망했다.

47년을 살다간 화가 토마스 콜과 146세 생일을 지낸 인도네시아인 음바 고토씨와의 년령 차는 약1세기의 시공간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99살 차이가 난다.(다음 달 출간되는 필자의 책 「중년의 결혼생활과 삶, 그리고 졸혼」 서문에서 발췌)


내가 만일 60세에 퇴직한다면 음바 고토씨 기준으로는 퇴직 후 86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만큼 기대활동수명이 과거와 다르게 늘어났음을 실감 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1세기전과 달리 이렇게 많이 남은 시간을 단순히 취미나 휴식으로만 일관해서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허망한 삶을 살 것인지 안 봐도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졸혼이란 이렇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우리부부가 어떻게 살 것인가 에 대해 계획을 세워보자는 것이다.


최고의 행복과 가치는 개인의 자아실현이고 원하는 삶을 한번 살다가 죽는 것이 후회 없는 삶임은 여러 통계에서 나타난 공통적 결론이다. 하지만 정년과 퇴직을 맞이한 부부들은 가족을 위해 지금까지 자신의 꿈을 묻어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 바깥나들이 하다 들어온 남편 혹은 부인에게 한번 물어보자 “여보, 당신이 젊었을 때의 꿈이 무엇이었소” 하고. 쑥스럽다고?

어째든 이런 상황에서 졸혼 얘기를 꺼냈다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너무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 든다.


둘째, 결혼생활에 대한 가치구조의 변화이다. 물른 이 가치구조의 배경에는 위의 첫 번째에서 논한 ‘수명연장’과 관련 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결혼초기에 믿음으로 약속했던 부부로서 ‘평생 함께할 서약’의 유효기간이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조정시간이나 내용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내 인생의 모든 것’(You’re my everything)이라는 종래의 결혼가치관의 유효기간은 1세기 전 대략 60세 전후해서 삶을 정리하던 시기에는 그런대로 유지 될 수 있는 내용 이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해 상대방에 올인 하던 이런 가치관은 100세 수명시대에 ‘우울증’만 불러일으키는 원인만 제공 할 뿐이다. 이는 사람들이 신의가 없거나 자질이 타락해서라기보다는 긴 세월동안 사랑의 침식현상에 따른 어쩌면 자연스러운 부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제 결혼관계 내에서 우울증 증세는 그 주기가 더 빨라졌거나 수시로 나타나는 모양새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가징 비근한 예로는 유감스럽지만 산후 우울증 증세도 여기에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이 잘못 되었다기 보다는 드러난 현상에 대해 바로 알고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래 다행스러운 것은,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 내에서도 ‘개인이 행복’해야 결혼생활도 행복하다는 의식이 드러나고 표출된 것은, 먼 장래 그리고 우리의 건강한 결혼생활을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부부관계에서 어느 일방의 고통이나 희생 속에 한 가정이 유지 되는 듯한 모습은 과거 인습에 의해 우리의 삶이 규정되었던 옛날 얘기 일뿐이다. 졸혼은 바로 이런 결혼에 대한, 우울증세에 대한 탈출 비상구이다.

이는 상대방이 꼭 싫어서, 그래서 이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언젠가 졸혼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리고 이런 기대감으로 인해 지금은 파트너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지만 곧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금은 내가 인내하고 견뎌야 하는 시기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졸혼은 결혼생활을 인내하고 견디게 하는 디딤돌의 개념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세상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과 같은 담금질 과정을 거쳐 대학과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타인과의 경쟁을 거치면서 더욱 성숙하게 성장한다. 지금의 나란 존재는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결혼생활에서도 지금은 가족을 위해 주변을 위해 충분히 자신의 꿈을 접고 희생 할 가치가 있다. 이런 생활은 성인으로써 결혼당사자로써 중요한 한축의 파트너 역할이었고, 인생의 성숙과정에서는 자신을 담금질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녀의 출가 등 그 이후의 이런 삶은, 가족을 위해서도 진정 본인을 위해서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 졸혼 개념은 결혼생활의 또 다른 자신을 위한 여행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pixabay/by 한국전환기가정센터포럼 재혼헬프라인



셋째, 그래서 졸혼은 결혼생활에서 관심대상을 ‘타인’에게서 이제 ‘자기 자신’으로 돌려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수면학자들의 얘기를 빌면 결혼 생활 중 가장 ‘이기적인 행동’이 ‘나 이제 잘께’ 라고 말하면서 ‘잠자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비록 한 침대에서 자더라도,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고 있는데 한사람은 무사태평으로 코를 골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결혼한 사이라도 무시로 그 장면을 목격하거나 체험 한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혼자서 잠에 푹 빠지거나 나를 두고 홀로 길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참으로 이기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이것이 본래 삶의 원형이자 본질임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비록 결혼을 해서 한 몸이 되었다고 선언 하더라도 ‘너’와‘나’의 개념은 원천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고, 결혼했다 하더라도 이 차이를 무시한다는 것은 결혼생활에 무리를 가 할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칼럼의 제목처럼 “졸혼 할 바 엔 차라리 이혼을 하겠다”는 발상은 상대방을 ‘자기결정권을 지닌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구시대처럼 결혼개념을 소유개념 혹은 피동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초기의 사랑에서 열정은 너와 나의 ‘융합’이다. 소금인형처럼 바닷물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고유 목적이고 사랑이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다르다.

결혼생활은 하나가 된 몸에서 지금처럼 추운 겨울날씨에는 방안의 실내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따듯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아궁이에 장작 불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불을 지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건강한 결혼생활유지는 사랑의 융합에서 각자 역할을 위한 ‘분리’가 필수적이다.


졸혼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생활에서 가족을 위해 지금까지 봉사 해왔던 ‘분리’역할에서 그 대상을 이제 ‘자기 자신’으로 돌리고, 자신의 자양분 축적을 위해 마지막으로 그 힘을 쏟아 붇는 과정이다.

파트너가 이제 자신의 꿈을 위해 새롭게 도약하려고 하는데 그를 지지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할 때, 파트너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차라리 나와 이혼하고 하라’고 말을 할 부부는 없을 것이다.


넷째, 졸혼은 이혼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다.

논리는 ‘기-승-전-이혼’이 아니고 ‘기-승-전-졸혼’이다. 졸혼의 반응에 대한 시중의 우려는 떨어져 지내다 보면 ’안보면 멀어 진다‘는 생각인데 우선 이혼을 목전에 두고 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안보면 멀어지는‘ 이 논리는 오히려 반가운 생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안보니까 더 이상 싸울 일도 없어지고, 직접대면에 의한 관계악화는 당장 피 할 수 가 있으니까 말이다. 물른 미봉책이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변하기 마련이다.

법원에서 이혼재판을 받기 전 결혼숙려기간이라는 ’절차과정‘을 의무화 시키는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지켜보자는 것이다. 이때 이혼 철회가 유의미한 숫자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혼회피수단으로 졸혼을 선택한다면 어느 한쪽에서는 분명 ‘비자발적 졸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혼 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막상 이혼을 감행한 사람들이 이혼 후 후회가 많다는 사실은 졸혼을 하나의 선택지로 생각해 보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분명 확실 한 것은 이혼은 인생의 실패 흔적이다. 사실 어떤 결혼은 이혼을 통해 종료 하는 것이 당사자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것도 분명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혼은 졸혼이라는 구조조정기간을 통해 보류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혼은 감행해 보지 않아서 그렇지, 직접 이혼의 굴곡을 겪어 본 사람들에 의하면 평생 마음의 빚을 안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자녀들에게는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일이 되게 된다.


이제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졸혼은 특히 아이들을 출가 시킨 후 남은 시간들에 대해서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때 부부가 함께 해도 좋고 따로 해도 좋다는 것이다. 따로 한다고 해서 세상이 뒤 집이는 일은 없다. 부득이 따로 떨어져 생활하다보면 우리는 이를 ‘졸혼’이라고 명명 하면서, 서로의 마지막 삶을 위해 응원하고 지원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혼을 상상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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